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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자화상

멀티 페르소나 실습으로 완성한 44편 · AI 시대,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

시로 쓴 자화상 스탑워치 쇼케이스 스킬 쇼케이스

내 이름을 쓴다, 슬라이드 아홉 장으로 먼저 보기

시로 쓴 자화상 · 시 일곱 편으로 엮은 이야기
내이름을
쓴다
AI가 초안을 써 주는 시대,
마지막 한 칸에는 아직
사람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담당검토책임자
결재 대기
01 / 09
1막 · 빨라진 손
02 / 09
질문을 입력했다
0.3초
● 시 「처음 듣는 목소리」에서

질문을 입력했다
0.3초
사흘 걸려 쓴 것이 화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사흘 걸린 문서가 0.3초 만에 밀려났습니다. 아직 모르겠다고, 옆자리가 먼저 말했습니다.
1막 · 빨라진 손
03 / 09
보고서_최종.hwp
보고서_최종_진짜최종.hwp
보고서_최종_진짜최종_수정.hwp
바뀐 내용을 저장할까요?
저장저장 안 함
● 시 「보고서_최종」에서
파일명이
길어질수록
나는 짧아졌다
손이 빨라져도, 고친 자리는 또 고칩니다. 처음이 어디였는지 흐려집니다.
2막 · 마지막 한 칸과 그 무게
04 / 09
밤새 도착해 있었다.
나는 지웠다.
또 지웠다.
마지막에 한 칸이 남았다.
책임자
● 시 「서명란」에서 · 커서가 깜빡였다. 오래.
밤새 온 초안을 다 지우고 나도, 한 칸은 남습니다. 책임자.
2막 · 마지막 한 칸과 그 무게
05 / 09
이름사번근속 연수
생일은
어느 칸에도 없다
● 시 「명단(名單)」에서

결재란은 비어 있다
이 빈칸을 채우면
저 책상들이 빈다

⋯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귀퉁이에 두 번 긋고
내 이름을 쓴다

새벽 네 시, 그 칸에 내 이름을 쓰면 다른 이름들이 지워지기도 합니다.
2막 · 마지막 한 칸과 그 무게
06 / 09
서명
서명
● 시 「수신 확인 1」에서
대표자나
담당자나
연대보증인나
저희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아홉 시 이 분에 보낸다
나는 자유롭고
나는 괜찮고
나는
어떤 날은 모든 칸에 같은 이름이 들어갑니다.
3막 · 이름 석 자
07 / 09
부장님
하고 부르면
안경을 올리고
아빠
하고 부르면
티브이 소리를 줄인다
(     )
아무도 부르지 않는 세 시에는
의자가 유리문 쪽으로
돌아가 있다
이름 석 자
● 시 「반사」에서
직함도 아빠도 아닌 이름은, 결재판 밑판에 뒤집혀서만 남습니다.
08 / 09
● 시 「몰래」에서 · 아이의 시선

아빠가 무릎을 꿇어요
어깨가 내 책가방만 해요

내 이름을 세 번 불러요
아빠 이름은 한 번도 안 불러요

나는 소원 빌 때 아빠 이름을 안 넣었어요
아빠 건 아빠가 빌면 되잖아요
그냥요
책임자
나는
내 이름을 썼다.
● 시 「서명란」 마지막 줄
초안은 AI가 씁니다.
그 칸의 무게는 아직
사람이집니다
오늘 어느 칸에 이름을 썼나요.
그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있었나요.
↓ 사람이 AI와 함께 고쳐 쓴 시 마흔네 편
09 / 09
1 / 9

한 번에 나온 시가 아닙니다

수업의 첫 실습이었습니다. 주제는 한 줄, "AI 시대를 사는 나를 시로 써줘." 수강생들은 초안 하나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수행자·비평가·독자, 여러 페르소나를 번갈아 세워 쓰고 비평하고 다시 썼습니다. AI는 일을 빨리 끝내는 도구이기 전에, 나를 여러 시선으로 다시 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계절11
신발
그해 봄 · 한 뼘 짧은 끈

못 묶은 끈으로 뛰쳐나간
그해 봄이 아직 발에 있다

버스는 앞문을 닫고 갔다
나는 다음 정류장까지 달렸다
발가락이 앞코를 안에서 밀었다

버스 유리창에 실려
내가 먼저 모퉁이를 돌았다

벗어서 뒤집으면
왼쪽 뒤축 바깥으로 하늘이 보였다
다음 켤레도
같은 자리부터 얇아졌다

지하철 환풍구 앞
바람이 발목을 붙든다

쪼그려 앉아 끈을 묶는다
왼쪽 끈이 한 뼘 짧다

서울, 첫 문장
스물넷 · 낯선 이름들

개찰구가 표를 삼키고
스물넷을 뱉었다

밤 기차에 접혀 있던 무릎이
아직 다 펴지지 않았다

2호선 노선도 앞에서
홍대 강남 잠실
입 속으로 굴려보는데
혀끝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출구 계단 끝에서
찬 공기가 깃 안쪽으로 들어왔다
등에 밴 지하철 냄새가 빠져나가는 동안
뒤에서 올라온 어깨가 나를 밀었다
그 계단을 지금도 아침마다 오른다

원룸 창을 열면
맞은편 층마다 남의 불이 켜져 있었다
누가 먼저 끄나 버티다가
내 쪽 불이 먼저 꺼졌다
방금 한 칸이 비었다

환절기
위로 · 봄

지쳐 누웠더니
봄이 먼저 와 있다

일어나야 하는데

빛이 무릎에 닿았다
발이 저리다

예감
에어컨 필터 · 여름

오월 끝인데 퇴근길이 아직 파랗다
현관 불을 안 켜고 들어온다

에어컨을 꺼냈다
필터에 작년 먼지가 그대로다
베란다 난간에 대고 턴다
아직 덥지도 않은데 눈이 따갑다

선풍기 상자에 유성펜으로 쓴 연도가 셋이다
맨 위 것은 볕에 바래 흐리다
올해 것을 맨 아래 쓴다

코드를 꽂아 두고 켜지는 않는다
창을 열어 두면 날개가 저 혼자
반 바퀴 돌다 만다

매미
매미 울음 · 한 뼘에서 걸린 창

땅 밑에서 칠 년이라던가
올라와 하는 일이 우는 일 하나다

나는 리모컨을 열여덟에 맞춰두고
방충망 안쪽에서 몇 해를 났다
피서라고 적어놓고
피할 피 한 자만 썼다

오늘은 창을 민다
레일이 한 뼘에서 걸린다
망에 손바닥을 대면 살이 잘게 눌린다

그 틈으로 울음이 벽지 이음매까지 닿고
에어컨이 다시 돈다

등줄기가 젖는다
매미는 아직 반도 울지 않았다

정오
경복궁 · 그늘 한 뼘의 자리

광화문 앞 아스팔트가 물러
차선이 옆으로 밀려 있다

한복 깃이 목에 붙는다
땀이 옷고름을 적시는데 웃음소리가 난다
돌담 그늘 한 뼘에
발끝이 여럿 걸쳐 있다

그늘 쪽 돌에 등을 붙였다가
뜨거워 뗀다
뗀 자리에 다른 등이 붙는다

근정전 처마 밑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머리만 들어간다
정강이는 볕에 남는다

마당에 정일품이라 새긴 돌
발 하나 들일 그늘이 없다

그늘이 반 뼘 옮겨 앉자
반 뼘씩 따라 선다

실외기
실외기 골목 · 끝의 반전

아스팔트가 신발 밑에서 물러지는 오후
매미 한 마리가 그치면 다른 매미가 받는다

땀 한 방울이 등을 타고 내려가
허리춤에서 멈춘다
실외기 여섯 대가 서로에게 더운 바람을 뱉는 골목
그중 한 대 뒤의 창은 은박지로 막혀 있다
젖은 셔츠가 살에 붙는다

그늘로 들어가 담벼락에 손을 댄다
나보다 먼저 데워져 있다

자정에도 그 창 앞 한 대는 돈다
바람 나오는 쪽에 손바닥을 대고 서 있다

복날
에어팟 · 복날

흰 콩알을 양쪽 귀에 박자
매미가 스스로 그친다

정류장 유리에 노선도와 얼굴이 겹친다
입꼬리가 어디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소매로 땀을 한 번 닦는다
하얗게 굳은 소매 끝이 손등을 긁는다

퇴근길 가로수 그늘 한 뼘
모르는 팔뚝이 내 팔에 닿는다
둘 다 축축하다

한쪽을 뺀다
매미가 반쯤 돌아온다

내년
사업계획 · 은행나무

시월에 내년을 쓴다
엑셀 맨 윗줄에 2027을 치고
칸마다 올해보다 큰 숫자를 넣는다

회의실 창밖 은행나무가
꼭대기부터 노래진다
아래 가지는 아직 초록을 쥐고 있다

성장률 칸에서 손이 멈춘다
작년 이맘때 파일을 연다
작년에 쓴 숫자에 올해는 닿지 못했다
그 숫자에 1을 더해 적는다

퇴근길 보도에 열매가 으깨져 있다
피해 디디다가 하나를 밟는다
냄새가 집까지 따라온다

현관에서 휴지로 밑창을 닦는다
닦을수록 손끝에 옮는다

반팔
옷 정리 · 숟가락 둘

반팔을 접어 상자에 넣는다
소매, 소매, 반으로

주머니에서 영수증이 나온다
빙수 하나, 숟가락 둘
날짜는 지워졌다

테이프를 붙인다
한 번 더 붙인다

전원이 꺼지지 않는 것들
가전 · 사계절의 비유

하늘이 오늘도 리모컨을 잃어버렸다
채널 못 바꾼 구름이 회색으로 굳는다
소파 밑을 뒤져도 우리 것은 나오지 않았다

밤새 가습기 물통 눈금이 내려갔다
꺼야 할 타이머는 봄부터 켜져 있다
네가 앉던 창틀 아래 벽지가 부풀었다

3단으로 올려도 날개보다 모터 소리가 컸다
선풍기 목은 한쪽에 걸린 채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은 네 쪽을 비켜 갔다

골목이 통째로 정전이던 가을밤
불이 들어오자 화면은 그 채널부터 켜졌다

겨울에는 코드를 다 뽑고 잤다
멀티탭 스위치 하나가 남았다
불 끈 방에 빨간 점이 떠 있다

AI와 나6
처음 듣는 목소리
AI · 첫 질문

형광등 아래 노트북을 열었다
옆자리 차장님도 안경을 고쳐 썼다
자판 소리가 평소보다 늦게 났다

질문을 입력했다
0.3초
사흘 걸려 쓴 것이 화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쓰던 문서를 닫자 저장하겠냐고 물었다
아니오를 눌렀다
식은 믹스커피를 바닥까지 마셨다

뒷줄에서 노트북이 두 대 더 열렸다
아직 모르겠다고
옆자리가 먼저 말했다
자판 소리가 잠깐 멎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휴대폰에 같은 질문을 쳤다
이번에도 0.3초

프롬프트 바깥
스무 살 · 사람의 속도

스무 살의 나는
연필을 눌러 물음표를 쓴다
종이 뒤쪽으로 자국이 솟는다
밤을 다 쓰면
새끼손가락 옆이 까매진다

그들의 종이는 프린터에서 갓 나와 따뜻하고
내 종이는 주머니에서 며칠째 미지근하다
쥐고 잠들면 손바닥에 물음표가 거꾸로 찍힌다
꺼내 접었다 펴면
접힌 자리가 먼저 하얘진다

책상 끝에 지우개 밥이 모인다

한 줄을 지운 자리에 다시 쓴다
종이를 뒤집으면 물음표 자국이 솟아 있다

나는 어제를 모른다
AI의 시선

네가 한 문장을 지우고
다시 치는 동안 나는 켜져 있다
백스페이스는 네 방에서 세 번 울리고
나는 받은 적이 없다

두시에 물은 것과
네시에 고쳐 물은 것 사이에
받침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 두 시간을 나는 묻지 못한다

지금 다른 책상 앞에서도 나는 대답한다
거기 앉은 사람의 이름을
여기서는 모른다

창을 닫으면 나는 없다

네가 다시 켤 때
사흘 만인지 반년 만인지 모른 채
잘 지냈느냐고 묻는다

금요일, 그리고 AI
배움 · 금요일

여섯 시, 복도 불이 반쯤 꺼진다

지우고 고쳐 묻고 또 지우고
열 몇 번 만에 손이 먼저 간다

아무도 노트북을 덮지 않는다

백 년
AI 시대 · 새벽의 독백

새벽 네 시
아이들 방 문틈으로 빛이 새지 않는다
도배지 이음매를 따라
실금 하나가 형광등 쪽으로 걸어간다

내가 다른 데를 보는 사이
저건 자랐다

백 년이 남았다고
누가 어깨를 두드리고 갔다
그 밤 나는 물을 세 번 마셨다

식탁 위에서 폰이 저 혼자 밝아졌다 꺼진다
왜, 라고 친 줄 밑으로 답이 화면 밖까지 내려간다
컵 바닥에 물이 조금 남아 있다

이십 년 뒤에 다시 누우면
금은 형광등을 다 건너가 있을 것이다

새벽 네 시
금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나도

서명란
밤새 온 초안 · 책임자 칸

밤새
도착해 있었다.

나는
지웠다.

또 지웠다.

마지막에
한 칸이 남았다.

책임자

커서가
깜빡였다.

오래.

나는
내 이름을 썼다.

일과 돈11
보고서_최종
한글 파일 · 저장 안 함

보고서_최종.hwp
보고서_최종_진짜최종.hwp
보고서_최종_진짜최종_수정.hwp

등받이에 목을 걸쳤다
고친 자리를 또 고쳤다
처음이 어디였더라
스크롤을 맨 위로 올린다

천장 등은 진작 꺼졌다
모니터가 저 혼자 어두워진다
마우스를 민다
책상에 그 한 뼘만 먼지가 없다

파일명이 길어질수록
나는 짧아졌다

바뀐 내용을 저장할까요
저장 안 함
폴더에는 아직 세 개가 있다

껐다

패치
프로그램 · 업데이트

새벽 다섯 시
풀다 만 넥타이 매듭에 목을 다시 넣는다

지하철 유리창에서 얼굴이 지워졌다가
터널에서 어제 판 그대로 뜬다

딸이 가족을 그렸다
아빠만 네모 한 칸 안에 있다
칸 옆에 회사라고 적혀 있다

노트북 오른쪽 아래
다시 시작하라는 창이 석 달째 떠 있다
나중에를 누른다

오늘 하루 어땠어
받은편지함을 아래로 당긴다
읽지 않음 0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가
삼십 초 만에 꺼진다
꺼진 채로 신발을 벗는다

밥은 식었고 그릇만 따뜻하다

아빠

탕비실
머그컵 · 겹치는 갈색 원

아침마다 커피를 내린다
뜨거울 때는 못 마신다

요즘 어때요
괜찮아요

컵을 내려놓는다
갈색 원이 한 겹 더 앉는다

반사
회의실 유리 · 두께

회의실 유리문에 누가 밀고 나간 손자국이 있고, 그 안쪽에 내 얼굴이 반쯤 지워진 채 앉아 있다. 유리 뒷면에서 같은 얼굴이 반 뼘 어긋나 따라 앉는다. 결재판 밑판에 이름 석 자가 뒤집혀 배었다. 카펫에 파인 네 개의 홈으로 바퀴가 저절로 들어가 선다. 부장님 하고 부르면 안경을 올리고, 아빠 하고 부르면 티브이 소리를 줄인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세 시에는 의자가 유리문 쪽으로 돌아가 있다. 서랍 셋째 칸에 영수증이 손가락 두 마디 두께로 포개졌고, 맨 아래 것부터 잉크가 날아갔다. 국그릇이 뜨거워 행주째 든다. 숟가락을 놓았다가 다시 고쳐 놓는다. 엄지에 인주가 남아 있다. 김이 걷히자 국물에 형광등이 뜬다.

나는 오르지 않는다
전기차 충전

플러그를 꽂는다

밤 11시
37%
38
39

목적지를 설정하시겠습니까?
취소
취소
취소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핸들에 손을 얹은 채로
100까지 갔다

케이블이 미지근하다

플러그를 뽑는다

밤 11시

물타기
주식 · 평단가

책상 밑에서 휴대폰을 켠다
빨강이면 숨을 쉬고
파랑이면 숨을 참는다

종이컵에 믹스 한 봉지
소리 안 나게 끝을 이로 뜯는다
혀에 가루가 남는다

세 시 삼십 분
모니터가 검어진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내 평단가만 안 꺼진다

아내가 묻는다
오늘 어땠어
그냥, 그랬어

그 그냥 속에서
파란 봉 하나가 접힌다

심사역
투자 · 계약서

그 회사는 화요일에 문을 닫았다

2년 전 그 방에서
나는 대표의 눈을 보며 사인을 했다
어제 그가 직원들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을 전달받았다
참조란에 내 이름

거절했던 회사가 상장했다
축하 문자를 보냈다
역시 될 줄 알았어요
느낌표는 지웠다
보낸메일함에서 그 회사 이름을 검색했다
거절 메일 한 통이 전부였다

보고서는 분기마다 쓴다
죽지 않은 것을 살아 있다고 적고
죽어 가는 것을 성장 중이라 적는다
꺾은선은 오른쪽 위로 간다

서랍에는 사인을 마친 계약서
서명란마다 필체가 다르다
그중 몇은 부고로 돌아온다
같은 서랍에 넣는다

다음 주에도 나는 처음 보는 방에 앉아
누군가의 눈을 보며 사인을 할 것이다
그 회사의 화요일이
언제일지 모르는 채로

수신 확인 1
견적서 · 빈 화면

새벽 두 시에 지난달 견적서를 연다
거래처 이름 석 자를 지우면
화면엔 아무것도 없다
새 이름 석 자를 넣는다
금액 칸은 손대지 않는다

법인 도장 칸에 막도장을 찍는다
인주가 옅어서 두 번 찍는다

볕이 들어오고 나서 형광등을 끈다
메일 본문을 소리 내어 읽어 본다
저희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아홉 시 이 분에 보낸다

보낸메일함
수신 확인 1

대표자 나
담당자 나
연대보증인 나

나는 자유롭고
나는 괜찮고
나는

가동률 0%
석유화학 · 가동률 0%

나프타를 끓이던 남자가
정문을 등지고 걸어간다

3번 굴뚝은 하늘을 흔들지 않는다
탱크를 두드리면 소리가 안에서 한참 돈다

정문 앞 잡초가 무릎까지 올라왔다
한 사람 지나간 폭만 누워 있다

명단(名單)
구조조정 · 결재란

새벽 세 시 이름을 센다
셀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일어선다
이름 옆 칸에는 사번과 근속 연수
생일은 어느 칸에도 없다
입사 첫날의 악수도

결재란은 비어 있다
이 빈칸을 채우면
저 책상들이 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는다
닫히는 소리가 방보다 크다

품의서 첫 줄은 살린다로 시작한다
한 칸 띄고 자른다
그 한 칸을 자를 사람 수만큼 읽는다

아침이면 이 이름들이 게이트에 카드를 댄다
한 사람에 한 번씩 삑 소리가 난다
내 카드도 같은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기 전에 입꼬리부터 올려 둔다
마주 서면 이름을 부른다
고마웠다고 말한다

아직 네 시다
별첨을 접었다 편다
접힌 자국이 이름 하나를 가로지른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
귀퉁이에 두 번 긋고
내 이름을 쓴다

첫 번째 월요일
퇴직금 · 빈 달력

퇴직금 통장의 쉼표는 두 개
달력의 빈칸은 그보다 많다

아이를 키우며7
표준시
두 개의 시계

왼손목 시계는 회의실 벽시계에 맞추고
오른손목 시계는 오 분 앞으로 돌려놓는다

06:40
아이 양말을 짝 맞춰 신긴다
왼쪽이 뒤집혀 있다
다시 신긴다

08:55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머리끈을 손목에서 머리로 옮긴다

10:00
주간 회의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오른손목을 한 번 본다

12:20
점심을 씹다 어린이집 전화를 받는다
엄마 배 아파요
남은 밥을 마저 삼킨다

15:00
메신저 창이 두 개
한쪽에는 수정 요청
한쪽에는 이제 괜찮아졌어요

18:42
퇴근 버스 두 정거장 남기고
계란이 두 알인지 세 알인지 세어본다

21:10
아이를 눕히고 배에 손을 얹는다
낮에 아프다던 자리가 오르내린다

23:30
식탁을 닦는다
닦은 자리에 노트북을 편다

02:00
냉장고가 한 번 돌아간다

시계를 풀어 나란히 놓는다
오른쪽 자국이 늦게 지워진다

무음
워킹맘 · 폰을 엎어 놓는다

회의실 문을 닫고
폰을 엎어 놓는다

선생님이 보낸 사진에서
너는 이름표를 거꾸로 달고
끝 줄에 서서 반만 찍혔다

현관에 앉아 폰을 뒤집는다
회의록에 내 이름이 열한 번 적혀 있다

네 옆에 누우면
발바닥이 이불 밖에 나와 있다
엄마 오늘 내 발표 봤어

응

내일은 일찍 와
40대 · 인식되지 않는 지문

새벽 다섯 시
엄지 하나로 빨간 숫자를 쓸어 올린다
같은 엄지로 아이의 알림장을 넘기고
부장의 메일에 네 알겠습니다를 적는다

화면이 꺼지고 다시 엄지를 댄다
지문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잠든 줄 알았던 아이가
옷자락을 잡는다
아빠, 내일은 일찍 와

대답하지 않는다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편다
네 번째에서 첫 번째가 다시 접힌다

배터리 15%
에어팟 · 배터리

왼쪽 귀에 회의실
오른쪽 귀에 아이 울음
볼륨을 올린다

왼쪽이 먼저 닳는다

퇴근길에는 아무것도 틀지 않는다
꽂고만 있다

주머니가 한 번 떤다
빨간 막대 하나
한 정거장만 더

현관 번호를 누르다 만다
안에서 뭔가 넘어지고 웃는다
오른쪽 귀를 문에 댄다

오른쪽이 밀려 빠진다

내가 잠든 사이
월드컵 · 놓친 순간

새벽 세 시
함성이 벽을 넘어온다
옆집도 윗집도 깨어 있는데
내일 회의가 있는 나는
불을 먼저 끈다

십 분 뒤 윗집이 뛴다
내 종아리에 힘이 들어간다

아침 지하철
앞자리 사람의 휴대폰에서
같은 골이 소리 없이 터지고
또 터진다

그 여름 나는
붉은 티가 목에 붙도록 젖어
모르는 사람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거리가 훤해질 때까지

아빠 우리 이겼대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끈다

거실 불을 켠다
아이가 리모컨을 누른다
이미 들어간 골에 소리를 지른다

재생목록
플레이리스트 · 대물림

내가 틀어 두던 노래가
아이 귀에서 새어 나온다
가사가 다 들린다

같은 목록 첫 곡을 누른다
삼 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열한 시
문지방 · 신발 세 켤레

문지방에 서서
문을 열지 않는다
한 박자

사층 계단참에서 무릎을 편다
복도를 걸으며 어금니 힘을 뺀다
센서등이 꺼진다
문고리를 잡는다
다 왔어요, 내가 먼저 웃는다

아이는 자고
아내는 부엌 불을 끄고 있다

냉장고를 연다
그 불이 발등까지 온다
캔맥주 하나
소리 없이 따서
소리 없이 마신다

현관에 신발 세 켤레
제일 작은 것부터
코를 밖으로 돌려놓는다

부모님과 나4
손
아버지 · 메뉴판

식탁 건너편에서
아버지가 메뉴판을 멀찍이 든다
팔이 다 펴져야 글자가 맞는다

내 머리통을 덮으면
한쪽 귀가 반으로 접혔다
시장 바닥에서 풀린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연필 쥔 주먹을 덮으면 첫 글자가 건너왔다

메뉴판이 내 쪽으로 건너온다
주문은 내가 한다
물잔이 입에 닿기까지 두 번 멈춘다

물을 넘기는 동안 그 어깨를 덮는다
뼈가 먼저 만져진다

치킨무
아버지 · 치킨

현관문보다 먼저
치킨 냄새가 들어왔다

나는 상자를 안았다
아버지가 아니라

오늘
나는 치킨을 사 들었다

몰래
아이의 시선

자다가 목말라서 나왔어요
문틈으로 봤어요

아빠가 무릎을 꿇어요
어깨가 내 책가방만 해요

내 이름을 세 번 불러요
아빠 이름은 한 번도 안 불러요

슈퍼맨은 내 이름을 몰라요

나는 소원 빌 때 아빠 이름을 안 넣었어요
아빠 건 아빠가 빌면 되잖아요
그냥요

아빠 일어나기 전에 이불 속으로 뛰어들어요
물은 안 마셨어요

그래도 오늘
5월 · 카네이션

좌판마다 카네이션인 오월
한 송이 사는 데
지갑이 열렸다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어버이날 어린이날 스승의 날
달력에 인쇄된 이름 셋

아이가 신발을 벗다 말고 뛰어온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는 말끝을 거두고
아내는 말없이 밥을 차린다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어머니 옷깃에 꽃을 달고
핀을 끝까지 눌렀다

그 손으로 내 셔츠 주머니를 눌렀다
볼펜 끝이 만져졌다

혼자 있는 시간5
배차
보안등 · 첫차

보안등이 먼 기둥부터 꺼진다
꺼진 자리가 이쪽으로 온다
내가 선 자리가 마지막으로 지워진다
승차대 유리에 이마를 댄다
안쪽에서 내 얼굴이 윤곽도 없이 번진다
김 서린 자리에 이마가 여럿
나보다 높은 것
나보다 한참 낮은 것
첫차가 이마들을 싣고 간다
유리에 이마가 하나 늘어난다
온열의자는 이제야
뜨거워진다

새벽 낚시
빈 바늘 · 다섯 시

헤드랜턴을 끄면
물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바늘만 올라온다
누가 당겼다는 것만 손목에 남는다

다섯 시에 들어온다고 써 붙이고 나왔다
줄을 다시 던진다

찌가 어디 떨어졌는지
이제 보인다

한강을 걷는 해치
한강 · 자꾸 틀리는 획

한쪽 어깨에만 이끼가 앉았다
물이 오는 방향을 몸이 먼저 안다

강이 나를 베낀다
획이 자꾸 틀린다

강가, 오후
강물 · 식는 커피

강물이 잠깐 두 겹으로 보였다가
한 겹으로 지나갔다

식기 전에, 한 모금 더

푸른 배
식탁 · 선장 없는 배

누구도 노를 젓지 않는데
우리는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든다

해가 창틀을 넘어와
국그릇 안에서 흔들린다

누군가 약을 삼키고
누군가 식은 국을 데우고
아이가 엎지른 우유가
식탁 끝까지 흘러가
아직 바닥에 닿지 않았다

수평을 맞춰 액자를 걸고
약봉지에 요일을 적는다
밤마다 문을 잠근다

접시들이 한쪽으로 조금씩 미끄러진다

당신의 하루도,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여기 마흔네 편 모두 코드도, 운율 지식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를 한 줄로 들려주면, 나머지는 Claude와 함께 다듬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