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맥스는 지독한 액션 영화다. 2시간 상영 시간 동안 강렬한 자동차 액션과 음악에 정신을 빼앗긴다. 하지만 더 곱씹어보면 감독의 세계관이 매우 흥미롭다.

1.
영화 매드맥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관은 효과적인 독재 국가이다. 핵전쟁 이후 자원 부족에 시달리는 22세기를 상정하면서 ‘물’이라는 자원을 독점한 독재자의 폭정과 이에 구걸하듯 살아가는 민중을 그린다. ‘시타델’의 독재자 ‘임모탄’은 물을 독점하면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한다. “물에 중독되지 마라”라는 친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절대로 충족하게 물을 배분하지 않는다. 민중들의 결핍은 역설적으로 독재자에 대한 절대 충성으로 드러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원을 집중시키면서 민중들에게는 절대로 풍족하게 자원을 배분하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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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풍족하다고 느끼기 직전까지만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효과적 통치의 핵심이다.

2.
정보의 차단은 또 하나의 효과적 독재 장치이다. 언론이라는 것이 존재할리 없는 ‘시타델’에서 독재자는 종교적 절대자와 일치하며 수많은 ‘워보이’를 양산한다. 죽음에 앞서 ‘나를 기억해줘, Witness me’라 외치는 워보이들의 맹목적 충성은 효과적 정보 차단을 통해 인간의 믿음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례이다. 절대적 양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칸트’의 절대적 도덕주의보다는 주위 사람의 도덕 수준에 맞추어 행동하는 ‘상대주의적 도덕주의’가 현실에서 얼마나 쉽게 적용될수 있는지 보여준다. 컨닝이 비교적 쉽게 용인되는 문화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국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듯,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보고 자란 도덕 규범에 맞추어 자신의 도덕적 잣대와 신념을 형성해 나간다. 독재자들이 제일 먼저 언로를 통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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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굴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것은 효과적 통치의 또 다른 장치이다.

3.
이 영화의 주인공인 ‘퓨리오사’가 겪는 여정은 영웅 서사와 매우 유사한 구조로 ‘떠났다가 돌아온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떠났다가 돌아온다’는 서사 구조는 J.R.R. 톨킨의 호빗과 반지의 제왕의 기본적 패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떠났다가 돌아온다’는 단순 물리적 공간의 변화만을 한정시켜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성숙도와 더 크게 연결되어 있다. 시타델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임모탄’의 성적 수단이 되어버린 여인들을 데리고 구출을 시도할 때만 해도 퓨리오사는 영웅이라기 보다는 조력자에 가까웠다. 맥스를 만나 ‘녹색의 땅, 마더랜드’를 향해 가면서도 퓨리오사는 영웅으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기 보다는 자신을 ‘구원, redemption’하기 위한 개인적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맥스의 조언으로 다시 ‘시타델’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순간, 그의 여정은 수동성에서 탈피해 적극성을 보인다.

하지만 호빗과 반지의 제왕, 또는 위대한 영웅 서사 구조에서 발견되듯,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시련과 좌절 그리고 극복이 반드시 필요하다. ‘퓨리오사’의 첫번째 시련은 여인 중 한명이 ‘임모탄’측으로부터 납치되었을 때 나타난다. 중저음의 헤비메탈에서 날카로운 음악으로 배경 음악의 변화가 생기는 지점이기도 하다. 시련 앞에 좌절을 선택하는 대신 눈빛이 되려 강인해지며 자신의 숙명을 깨닫는다. 두 번째는 맥스가 추락할려는 찰나 왼손(의수)으로 맥스의 발목을 잡으면서이다. 그 순간 적에게 칼로 공격을 받으나 퓨리오사는 결코 맥스의 발목을 놓지 않는다. 시련에도 불구하고 조언자를 배신하지 않는 강인함을 증명한다. 세 번째는 퓨리오사가 ‘임모탄’을 왼손(의수)으로 죽이면서 ‘Remember me’를 외치는 순간이다. 죽음을 맞이할 임모탄에게 기억하라고 외치는 것은 상대에게 얘기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는 자각의 외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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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퓨리오사’의 여정에서 ‘맥스’는 적극적 조력자이다. 협곡을 통과할 때 작전이 통하지 않자 맥스의 도움으로 협곡을 탈출한 것을 비롯해 맥스로부터 “희망을 품는 건 실수야. 망가져버린 삶을 되돌릴수 없다면 결국 미쳐 버릴 거야”와 같은 현실적인 조언들을 듣는다. ‘시타델’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의 길임을 안내하는 맥스는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에서 ‘간달프’처럼 영웅이 자신의 길을 가기위한 필요한 조언들을 아끼지 않는다. 맥스는 퓨리오사가 자신의 여정을 완성하자, ‘Let them up’을 외치는 민중 뒤로 사라지는 길을 택한다. 이는 퓨리오사가 조력자의 도움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온전한 개인으로서 영웅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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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민 조력자의 손을 잡았을 때 퓨리오사는 자신의 여정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5.
메인 스토리와 별개로 워보이인 ‘녹스’는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그 누구보다 열렬하게 천국의 문으로 가기 위한 자살을 감행하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자 신앙이 부족했다며 좌절한다. 독재자에 대한 믿음이 강한만큼 절대로 변화할 것 같지 않는 녹스를 변화시킨 것은 논리와 설득을 동반한 이성의 힘이 아니라 여인의 따뜻한 눈빛이었다. “아직은 천국으로 가기 위한 때가 아닌가보지”라는 말은 녹스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천국으로 가기 위한 다른 방식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감성적 의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여인의 눈빛은 그 나이대의 여성이 가지고 있을만한 ‘여성성’이 강조되기 보다는 ‘따뜻함’을 내포한 모성의 이미지가 강하며, 합리적 추론과 이성이 아닌 ‘모성’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 맹목적 추종자들을 교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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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의 회복이야말로 잃어버린 인간성을 치료하기 위한 효과적 치료제이다.

6.
독재 도시 시타넬을 무너뜨린 것은 일반 민중이 아니라 시타넬의 촉망받는 엘리트 중의 한명이었다. 즉, 내부로부터의 극복이야말로 부정을 탈피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한편, 민중은 철저하게 소극적 존재로 그려진다. 오랜 독재자가 죽었엄을 알았을 때, 일부 민중의 호응이 있었을 뿐 오히려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또다른 내부 조력자인 ‘엄마’들의 적극적 의지로 물이라는 한정적 재원을 배풀자 민중들은 그제서야 ‘Let them up’을 외치며 퓨리오사에게 동조한다.

영화에는 그려지지 않았으나, 퓨리오사가 어떤 통치 방식을 택할지는 두고 봐야 할 대목이다. 또다른 독재자가 될 수도, 아니면 황제가 되기는 하나 원로회 같은 견제 기구를 둘 수도, 아니면 극단적으로 민주주의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그 어떤 통치 방식을 택하건 ‘물’이라는 자원의 배분 문제는 퓨리오사가 핵심적으로 직면할 또 다른 문제이다.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자면 민중의 호감을 한순간에 얻고자 통치 초반에 자원을 배푸는 행위는 현명하지 못하다. 물이라는 자원이 무한정 나온다면 상관 없지만, 결국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장치는 도입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민중의 저항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7.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마지막 경구에 드러난다.

“희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 최초의 인류”

감독은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지금 있는 곳’을 떠나봐야 ‘소금’만 있는 또 다른 사막일 뿐 ‘지금 있는 곳’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확률 없는 희망보다는 더 희망적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동반된다. 과거 ‘녹색의 땅’에서 살던 ‘늙은 세대’가 ‘젊은 세대’의 희망을 위해 과감하게 피를 흘리며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이를 보여준다. ‘늙은 세대’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씨앗’을 품고 죽어가는 한 ‘늙은 세대’의 미소에서 나타나듯, 이는 한 순간의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품는다. 70대 노장 감독이 후예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